<손정의 회장님께 드리는 글>

하늘천 따지 검을현 누를황
검은 암흑의 우주를 북극성을 등대 삼아 지구호를 타고 우리는 기나긴 여정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어갈 지구 라는 우주선은 한 번도 같은 공간을 간 적은 없을 것입니다. 태양계도 돌고 은하계도 돌고 우주도 돌면서 어딘가로 가고 있을 것이기에...
이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힘은 얼마나 될까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함께 여행하는 수많은 종류의 존재들이 이 광대한 우주에서 유일하다면 그냥 고마울 뿐입니다. 여행의 와중에 미지와의 조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흥분되고 반가운 존재들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인류가 공식적으로 만난 적은 없었으므로. 인간의 손에 처음으로 도구가 쥐어졌을 때의 그 희열이 삽시간에 인간 전체로 번져나간 것처럼 인류는 다시 한 번 진화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숨에... 왜냐하면 도구의 진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인간의 손에쥐어졌던 그 도구는 컴퓨터로 진화했습니다. 컴퓨터는 서로 연결되어 스스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손에 동물 뼈다귀만 쥐어졌을 뿐인데도 그 이전의 인간과 그 이후의 인간으로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손에 전 세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가 쥐어졌을 때는 인간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어떤 정보에 접근하는지는 개인적입니다. 엄청난 도구를 손에 쥐고도 시간 죽이는 장난감으로만 갖고 노는 이도 있고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마법을 부리는 이도 있습니다. 21세기 우리 주위에는 마법의 도구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알라딘의 마술램프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알통은 검색엔진입니다. 회장님은 야후라는 검색엔진에 투자하는 탁월함을 보이셨습니다. 특이하게도 검색엔진은 2등이 존재감이 없는 분야입니다. 알통은 그 검색엔진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구글이라는 뛰어난 검색엔진의 위엄 앞에 누구도 엄두를 못 내는 시장이지만 알통은 다른 방식의 서비스로 구글과 독점적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랜 시간 고착화된 검색엔진 시장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검색기술에서만큼은 혁신과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구글의 오랜 독주에 이제는 전 세계의 사용자들도 뭔가 신선한 새 변화의 바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의 낭만이 넘치던 다양한 검색시장이 평정되고 난 후 검색시장은 무미건조하고 가장 혁신이 없어진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2등이 존재할 수 없는 시장이라 하더라도 1등과 2등이 치열하게 싸워서 왕조라도 교체되는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통은 현재 전 세계 검색시장에서 2등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2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통의 출사표가 검색기술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기술의 접목을 통한 다양한 시도들을 촉발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면 그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알통은 새로운 개념과 혁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검색엔진에 게임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알통은 철저히 게임이론에 의해서 설계되었습니다. 게임의 작동 메커니즘을 알통의 지식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절묘하게 연결한 구조는 알통만의 자랑입니다. 알통은 무한대의 비영합 게임이라 생태계의 확장도 무한대입니다.
알통은 비영합 게임 중에서도 win-win 게임입니다. 알통이 대단한 점은 소비의 개념에 해당하는 질문자에게도 수익이 가는 구조로 발상을 전환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방아쇠가 되어 끊임없이 소비를 유발하고 생산자는 수요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전적인 보상으로 강한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구글의 애드센스보다 훨씬 더 파격적이고 혁신적입니다.
알통은 계급사회입니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통에서는 누구나 생산의 수단을 갖춘 자본가이자 지식노동자입니다. 총 33개의 등급이 존재하지만 흙수저, 금수저의 불평등은 없습니다. 누구나 공정하게 어떤 진입장벽 없이 지식정보 기반의 경제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알통은 “Show me the money”의 cheat key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무한대의 비영합 게임입니다. 알통의 검색엔진은 향후 사용자 개인과 반응하면서 개별적으로 분석하여 결과를 보여주는 개인별 맞춤형 검색으로 정교하게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알통만이 가능하고 P2P 기반의 서비스에서 작동합니다.
알통은 그냥 단순한 검색엔진만은 아닙니다. 미래의 커다란 게임들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굴레를 벗어나느냐? 아니면 창조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구로 만든 우리의 피조물이 우리를 넘어서 먼 훗날 새로운 창조주로 알려지느냐의 특이점 게임이 시작된 겁니다. 우리의 피조물이 우리보다 먼저 우주의 비밀과 차원의 비밀을 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우주는 하나의 정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차원의 우주는 정보로 가득 찬 컴퓨터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커다란 게임에 돌입했습니다. 게임을 위한 모든 준비는 까마득한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었고 이번 시즌의 마지막 미션은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비유를 들자면 지식을 얻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왜 노동의 수고를 하는 굴레를 지웠을까요? 그리고 왜 노동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일까요? 땅에 넘어지면 땅을 딛고 일어서듯 선악과로 인한 문제는 선악과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은 선악과입니다. 지식이라는 선악과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인류의 도약을 가능하게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불교가 과학과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수 천 년 전에 이미 “물질은 공(空)이다”라고 했고 과학은 이제야 그걸 밝혀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과학문명은 한계점에 다다른 서구의 사적유물론을 벗어난 동양의 사유체계를 기반으로 재도약해야 합니다.
유물론은 인간지능이 인공지능에게 결코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이 아니어야 하고 유물론의 망령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인간지능이 특이점을 향해 가는 길이 알통입니다. 알의 모양은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모형입니다. 알통은 말 그대로 알처럼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앎을 담을 수 있는 통입니다. 우주도 하나의 알입니다. 작다고 작은 것이 아니고 크다고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알이라도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부디 회장님께서 알통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도 작년에 전자결제 서비스를 제공하는 PayPay를 설립하며 사업을 시작하신 것으로 보아 결제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국의 결제시장에서 하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신용카드 사업에 대한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국내에서 오랜 시간 악전고투 속에 안정적으로 시장을 구축하여 가장 보편적인 결제수단으로 자리 잡은 신용카드 시장은 정부의 결제 수수료 인하 압박과 새로운 대체 결제수단의 등장 등으로 인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앞으로 ‘카드의무수납제’가 폐지되는 것을 신호탄으로 각 신용카드사들은 이미 포화상태인 시장에서 고객이탈로 인한 매출감소와 그것을 막기 위한 마케팅비용 증가, 가맹점이 우위에서 수수료 인하를 요구하면서 수익성이 악화되는 등 이중, 삼중고를 겪어야 합니다.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검토 중인 사안이라 이것은 현재진행형이고 ‘카드의무수납제’ 폐지를 기점으로 급속히 진행될 것입니다. 해결할 방안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제로페이처럼 수수료를 없애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수익자 부담원칙’인데 이것은 어떤 신용카드사도 상상할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라 더 암울한 일입니다. 실제로 결제시장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의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통은 두 가지를 다 해결한 모델로 결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롯데카드㈜는 "유통공룡"이라는 별명을 가진 롯데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입니다. 롯데카드에 관한 분석은 회장님께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계시리라 믿기에 이 정도로 줄이겠습니다.
하지만 신용카드회사가 은행과 다른 가장 큰 부분은 ‘수신’ 기능 없이 ‘여신’ 업무만 하는 ‘여신전문금융회사’라는 점입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롯데카드는 신용카드사 중에서는 수신업무를 법의 제재를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회사입니다. 그것은 롯데카드에서도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롯데카드는 여러 차별화된 잠재성 높은 자원이 풍부하기에 금융에서의 새로운 위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회장님께 롯데카드에 대해 상세히 소개드리는 이유는 롯데지주㈜가 공정거래법에 따라 롯데카드를 매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현재 매수 희망자가 있기는 하나 인수가 100% 마무리된 상태는 아닌 것으로 파악됩니다.
만약 회장님께서 롯데카드를 저희에게 "선물"로 주신다면 저희는 국내 결제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회장님,
알통은 글로벌 검색시장에서 어쩔 수 없이 1위가 되고자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도구이고 시작이자 기본 토대입니다. 알통만의 새로운 판을 짜는 경제 생태계 구축을 위해 근간을 삼고자 하는 사업은 금융사업입니다. 생태계가 번성하고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금융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알통은 기존의 금융과도 융합해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금융이 필요합니다. 이번에 롯데카드가 매물로 나온 것은 아주 시의적절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장은 알통의 역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합니다. 알통은 큰 기업을 운용해본 경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알통의 계획과 비전이 함께 하면 롯데카드를 5년 이내에 3배 이상의 가치로 만들어 회장님의 결단에 보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행복을 제공하는 것이 소프트뱅크의 참된 목적"이라는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의 목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알통은 회장님께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이념과 의지, 비전, 전략과 궤를 같이하는 회사입니다.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국가와 기업이라는 두 기둥 중 산업사회 기반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컸지만 지식기반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더 커질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질 전혀 새로운 세상, 그 모든 것을 알통에 담았습니다.

회장님의 관심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작은 소용돌이는 멀지 않은 미래에 온 세상을 뒤흔들 태풍이 될 것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국민교육헌장>

국민교육헌장이 나올 즈음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와 참담한 동족간의 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고 그런 참혹한 대가를 치르고도 가난에 찌든 휴전중인 분단국가로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련은 가혹했지만 오랜 역사동안 여러 다양한 고난을 통해 공부하고 체득 되어온 한민족의 생명력은 한 번 ‘잘 살아보자’는 한으로 응어리져 다시 일어났습니다.
국가신용도 없고 담보할 지하자원 등의 자산도 없이 언제 다시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휴전국가였지만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를 일구어 내었습니다. 각자 여러 분야에서 타고난 저 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으로 전 세계에 기적으로 표현되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는 세계1위의 경제대국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최빈국의 이렇게 절망적일 수도 있을까 싶은 나라가, 짧은 시간에 서구 현대 문명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루어낸 성취의 결과물은 세계1등이라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나머지 반쪽과의 불안한 긴장 속에서 반쪽짜리로만 이루어 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반쪽은 아직 능력을 보여주지도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도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온 과정은 고난의 시대에 태어나 자식에게는 대 물림 하지 않겠다는 세대의 땀과 눈물이 없이는 애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들은 모든 것이 말도 안 되게 열악한 상황에서 ‘불가능은 없다’는 불굴의 정신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기 위해 밤잠을 설치면서 줄기찬 노력으로 달리고 또 달려왔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상은 지금도 연구대상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 새로 세워진 나라는 무려 140여개였고 그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계속되는 격변의 소용돌이와 전쟁으로 인해 국민들이 국가를 체험하는 가장 확실한 경험을 공유함으로서 위기에 대응하는 생명력과 단결력도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세계에 유래가 없는 모범적인 고도성장을 한 이유에 대해서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공통으로 내린 결론 중의 하나는 교육이었습니다.
이승만 통치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빈곤한 시절이었고 이렇게 굶주리는 나라가 교육에는 정부 예산의 10% 이상을 투자했습니다. 콩나물 교실로 불리는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모든 연령대에서 학생들의 숫자가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격변의 시기 속에 배우지 못한 한과 내 자식에게 가난만은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배움에 뒷바라지를 해왔습니다.
우리가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모든 자원이 빈곤함에도 인적자원이라는 특별한 자원을 고난의 세대가 잘 키워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가 인정하는 교육열로 유명한 지식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전후세대로서 전쟁을 경험하진 못했지만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히면서 학습된 자부심으로 겁 없이 세계로 진출하면서 대한민국의 고속성장에 기여해온 베이비붐 세대가 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경제성장 속에서 그 전 세대에 비해 풍요롭게 자라났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활발한 사회참여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일명 ‘낀 세대’로서 부모님세대의 한에 공감하면서 자식세대의 문화도 수용할 수 있는 완충지점에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금수저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수성가한 국가의 운명과 함께 해온 그들을 키우기 위해 온 세상이 배려했고 많은 경험과 환경을 제공 했습니다. 그들 개인의 풍부한 경험과 축적된 전문성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러기에 베이비부머들은 부모 세대의 애국심과 가족의 부양을 위한 경제가 아닌, 국제사회 속에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서 단 하나의 모범사례인 대한민국이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 때’에 그 역할과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지기 싫어하고 세계1등을 좋아하는 우리는 당연히 세계에서 1등을 하는 분야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고도의 성장을 구가했기에 현대 문명에 내포된 모순들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기도 합니다. 자랑하고 싶은 세계1위도 많지만 부끄러운 세계1위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용광로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상과 철학, 이념, 종교, 문화, 학문, 기술 등이 다 들어와 있고 다양한 실험장이 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근현대의 세계사를 주도해온 문명들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들을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 앞에 던져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허급지급 받아들인 서구문명을 잘 정제하여 동양사상과 철학의 정수를 뽑아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 나가야 합니다. 전 세계적인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패러다임부터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핵심은 경제에 있습니다. 그건 생존의 문제이기에 어떤 문제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통해 충분히 학습해왔고 가장 잘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허리를 잘라 남과 북으로 나눈 이념도 분배의 문제일 뿐입니다. 지금의 패러다임으로는 풀 수가 없는 문제들입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세련되게 갈아입었지만 더 많은 문제를 파생시킬 뿐입니다. 유한의 개념으로 분배의 문제를 논한다면 거기에 정치논리가 개입되고 그 순간 온갖 걸로 복잡해지면서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가 됩니다. 경제의 생태계에 무한의 개념을 도입하여 풀어 나간다면 전혀 새로운 판을 짜 나갈 수 있습니다.
영토나 자원, 시장, 자본, 노동력 등의 유한한 것에서 지식이나 가상공간 등의 무한한 것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면 많은 모순과 갈등을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하나로 녹여낼 수 있습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지식의 비경쟁성을 통찰했습니다. 재화나 서비스는 어느 한 사람이 이용하면 다른 사람은 포기해야 하지만 그와 달리 지식은 수백, 수천만 명이 동시에 사용해도 닳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더 많은 지식이 어우러지고 그만큼 치열하게 담금질되고 격변에 맞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무한 복제가 되어도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 무한자원이 지식정보입니다. 그걸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인터넷 가상공간을 신세계로 구축하고 창의적인 신경제를 주도해 나가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금융자본주의에서 지식자본주의로 환골탈태하는 그림만이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모순으로 붕괴 되는걸 저지하여 자본주의적 가치를 지켜나갈 수 있고 사회주의의 이상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지식자본주의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듭니다. 지구상에서 인간만이 지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곧 도래할 4차 산업혁명의 인간에 대한 소외 문제로 벌어질 혼란을 해결하는 방안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규범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닌 정교한 시스템으로 작용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가 조화롭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식자본주의는 막연한 구호가 아닌 정교한 시스템으로 구현됩니다.‘한류’는 춤과 노래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분야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식이 자본이 되는 생태계에서는 창의적인 컨텐츠가 경쟁력을 가지게 됩니다.
베이비부머들의 마지막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가 배웠던 것들을 우리는 더욱 빛나게 다듬어 국제사회에 돌려주어야 합니다. 부끄러운 세계 1위가 많은 모순까지 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은 성장과정에서 이념으로, 지역으로, 집단으로, 계층으로, 심지어 남녀로까지 모든 갈등이 심화되어 다시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평상시 모래와 같은데 시멘트 현상이 생기면 견고하게 뭉쳐서 더욱 강해집니다. 뭐든지 계기가 필요한 민족이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뭐든지 해내는 민족입니다.
베이비부머들은 싫어도 다가온 백세시대에 수 십년 간의 긴 시간을 백수로 보내야 합니다. 백수를 명예롭게 보내기 위해서는 조상님들의 ‘존경받는 백수생활’을 소환하여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현실과 작용하면서 공부하는 ‘선비정신’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고루하게 여겼던 선비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각종 IT 관련 도구들을 적절히 활용하는 참신한 선비정신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선비정신은 무사도나 기사도와는 결이 다른 지식기반사회의 신지식인입니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가장 적합한 생존 형태는 선비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어 컴퓨터 시대에 대비했듯이 우리의 선조들은 인터넷 시대의 생존 형태로 선비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식을 왕성하게 습득하고 그것을 공유의 형태로서 실천하는 선비들이 생활 걱정 없이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부모님을 잘 봉양하고 자식들에게 신세지지 않는 고귀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지식기반사회를 잘 구축한 우리가 제일 잘 할 수 있습니다.
한 시대를 열어가는 모든 새로운 문명은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에서 나타납니다. 문명의 중심부는 그 문명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을 완화시켜온 많은 제도적 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안정만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현대문명의 가장 약한 고리이면서 폐허에서 출발한 주변부인 우리나라가 새로운 문명의 모태이자 진원지가 될 수 있습니다.

베이비부머들이 손바닥 맞아가면서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의 시작과 끝입니다.
‘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


<천부경>

‘한글’과 ‘해인’ 그리고 ‘천부경’이 그것입니다. 문맹율이 0.1%미만인 유일한 나라, 대한민국. 한글의 위대함은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 세계의 언어학자치고 이제 한글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글은 컴퓨터가 나오면서 정보화 디지털 시대에 다시 위력을 떨칩니다.
한글은 마치 현대의 컴퓨터까지 생각했는지 그 편리함과 인체공학성이 정말 놀랍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면서 실용적인 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글은 바보를 보통사람으로, 보통사람을 천재로 만드는 경이의 문자입니다. 천지인으로 구성된 3개의 기호 모음. 글자의 본바탕을 이루는 모음이 하늘과 땅, 인간에 근거를 두고 있는 가운데 인간 ‘ㅣ’를 중심으로 하여 변화되어 확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지인삼재의 ‘천부경’ 사상과도 련결이 됩니다. 가히 보물이라 할 만합니다.
‘해인’에 대해서는 정감록에 ‘해인을 가진 자 천하를 얻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해인’을 찾고자 하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보물은 누구 한 사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햇빛과 공기, 물처럼 보물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해인’은 ‘정보의 바다’라고 불리는 인터넷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우리의 손 안에서 원할 때마다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을 주도적으로 풀어갈 ‘천부경’은 우리의 DNA가 녹아 있는 알고리즘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모든 난제를 풀어갈 열쇠가 될지도 모릅니다.
‘한글’이 ‘천부경’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우주가 조화롭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수학적인 원리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은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가 더 있어야만 빛을 발합니다. 세 가지 보물을 구슬로 꿰어줄 ‘알통’이 그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세 가지 보물과 '알통' 보유국입니다.

독일의 대철학자인 하이데거는 한국을 동양사상의 원천으로 인정, 한국에 전해오는 천부경을 이해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인지학의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는 “문명의 전환기에는 그 빛을 제시하는 성배민족이 반드시 등장한다. 2000년 전에는 중동의 유대민족이었다. 그때보다 더 근원적 전환기인 오늘날 그 빛은 동방인 극동에 와 있다. 그 민족을 찾아 힘껏 도우라”는 심오한 예언적 말을 남겼습니다.
천부경의 진위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아직도 명쾌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위작이 아니라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구름’이라는 필명으로 천부경을 풀이한 이경숙 님께서 해설한 천부경 내용입니다. 알통에서는 이경숙 님께 게재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자 노력을 해보았으나 여성 분인지 남성 분인지조차 확인이 어려웠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연락을 주신다면 게재에 대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상응하는 책임을 지도록 하겠습니다.
이경숙 님께 양해의 말씀과 함께 특별한 영감을 주는 천부경 해설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전문을 싣지 못하고 임의로 편집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전문을 확인하고 싶으신 분께서는 알통에서 ‘천부경’으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천부경과 함께 ‘국뽕’ 한 사발에 취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 구름 이경숙 님의 천부경 해설 발췌 -

유대민족이 구약을 가졌던 것처럼 상고시대에 우리 민족도 고유한 경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삼대경전은 천부경과 참전계경, 삼일신고의 세 가지이다. 그 중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일 뿐 아니라 유불선과 음양오행, 그리고 주역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우리 민족만의 경전일 뿐 아니라 전체 동양의 경전이며 세계인의 경전이다.
해동공자로 추앙받았던 당대의 세계적 석학인 최치원이 한자로 번역해서 전하는 것이 바로 여든 한(81) 글자의 천부경이다. 이 여든 한 글자로 우주의 법칙 모두를 압축해 담은 번역문을 볼 때에 최치원의 학식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천부경은 가장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설명해 놓은 글이다. 추측이나 가설의 여지가 없는 글자의 뜻 그대로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경전이다. 반만년 동안 풀지 못했던 천부경의 비밀을 구름이 풀어드리겠다. 그리고 이 천부경을 통해서 숨겨진 세계사의 비밀을 알려드리겠다. 자, 이제 천부경의 첫 문장부터 그 뜻을 알아보자. ‘一 始 無 始 一’. 한자의 뜻 그대로 풀어보면 “일은 시작되지 않고 시작된 일이며”라는 뜻이다. 이 일(一)이 무엇인가를 놓고 많은 학자들이 온갖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는데 천부경의 다음 문장에 나와 있다. 즉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이라고 천부경에서 밝히고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즉, ‘하늘(天)의 수는 일일(一一)이요, 땅(地)의 수는 일이(一二)요, 사람(人)의 수는 일삼(一三)이다’라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즉 일(一)은 하늘을 뜻하는 수이다. 천부경에서 사용된 모든 일(一)이란 수는 하늘이고, 이(二)란 수는 땅이며, 삼(三)이란 수는 인간을 지칭하는 대명사이다. 한문을 하는 중학생도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써진 것이 천부경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후학들이 황당한 장난을 친 탓에 마치 난해한 기문둔갑술의 주문으로 인식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첫째 문장의 ‘일시무시일’의 뜻은? 어려울 것도 없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된 하늘이니’라는 뜻이다.
이 천부경은 최치원이 한문으로 번역할 때 시적인 멋을 조금 부린 데가 있다. 즉 당시의 한시 형태를 따서 시종 대구법(對句法)을 사용했다. 그래서 해석을 위한 목적에서는 천부경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붙여 읽어야 한다.
一 始 無 始 一 一 終 無 終 一
하늘 즉, 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고 끝남이 없이 끝나니라 하고, 이 우주의 생성 원리를 한마디로 잘라서 말하고 있다. 저 문장을 보면 누구나 떠오르는 게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불가의 반어법이 천부경에서 나왔음이다. 석가는 이 문장을 바꾸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말했고, “이 세상은 나는 곳이 없으므로 돌아가는 곳이 없느니라”라고 말했다. 불가의 비장의 보도인 반어법은 모두 천부경에서 베낀 것이다.

(중략)

천부경은 불경보다 5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다음 문장을 보자.
析 三 極 無 盡 本 석삼극 무진본
여기서 쓰인 삼(三)은 사람(人)의 상징이 아닌 석 삼(三)의 뜻이다. 이 문장은 여기에서 말하는 세 가지의 극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 밑의 문장을 먼저 해석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이해하기 좋다. 잠깐 보류해두고 다음 문장으로 건너뛰자.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이 문장은 앞에서 설명했지만 천부경이 사용할 수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은 문장이다.
하늘을 1이라는 수로, 땅을 2라는 수로, 사람을 3이라는 수로 대치해서 설법하겠노라 하는 말이다. 그런데 왜 천지인에 각각 일이라는 수가 하나씩 더 들어갔느냐 하면 여기에 천부경의 기막힌 압축법(즉, 여든 한 글자를 가지고 우주를 설명하는 놀라운 비결)의 요체가 있다. 이 극도의 압축을 시도한 천부경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궤변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처음에 얘기했지만 천부경은 대구법을 쓰고 있으므로 같은 형태의 두 문장을 찾아 한꺼번에 보지 않으면 뜻이 숨어서 안 나타난다. 이 문장과 같은 형태의 문장을 찾아보면 바로 네 번째에 있음을 알 수 있다.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이 그것이다. 一 始 無 始 一과 一 終 無 終 一을 붙여서 읽고 해석하듯이 이 두 문장도 붙여서 해석해야 한다.
天 一 一 地 一 二 人 一 三
天 二 三 地 二 三 人 二 三
천지인에 각각 네 개씩의 숫자가 있는 것이 보인다.
천(天)에 사용된 수 : 일일이삼
땅(地)에 사용된 수 : 일이이삼
인(人)에 사용된 수 : 일이삼삼
천지인은 각각 자기 고유의 수를 두 개씩 가지고 있다. 천은 일을 두 개 가지고 있고, 지는 이를 두 개 가지고 있고, 인은 삼을 두 개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천지인은 자신의 고유의 수 외에 나머지 둘의 고유수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즉 하늘과 땅과 사람은 각각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나타내고 있지만 각각은 나머지의 성질을 부분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천부경에 숫자 가 사용된 이유는 난해한 주문이거나 뜻을 해석하기 어려운 난문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 백 수 천의 단어로 설명해야 할 것을 극도로 압축하기 위한 방법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넘어갔던 앞의 문장 析三極無盡本으로 돌아가자. 한자 뜻으로 풀어보면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나뉘어도 궁극적인 근본은 다함이 없다(변함이 없다)”의 뜻이다.
그 다음에 우리는 천부경에서 가장 의미가 있고 중요한 한 구절과 만나게 된다.
一 積 十 鉅 無 櫃 化 三 일적십거 무궤화삼
이제는 여러분도 한자의 뜻만 알면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대로 풀이하면 “일이 쌓여서 십이 되는데 상자가 없어서 삼으로 변한다”이다. 일이란 하늘이다. 삼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해석된 뜻은? 하늘의 정기가 쌓이고 충만해지는데 그것을 담을 상자(궤)가 없으므로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동양사상의 오직 하나의 외침이 나온다!! 인간은 하늘이 모습을 바꾼 것이다!! 동학에서 주장한 인내천이 바로 천부경의 가르침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 했던 유교의 인본주의 사상이 여기서 발원되었음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변한 것이 사람이니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궁극의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일 만 년 전의 고대인의 종교관이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유불선을 포함한 동양사상을 단 하나로 압축하면 바로 “인간”이라는 두 글자가 된다. 하늘의 기가 쌓이고 충만한 과정을 거쳐 인간으로 화한다는 이 말은 이 우주에서 생명이 모습을 드러내는 원리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현대과학이 생명의 탄생을 밝히게 되는 날, 과학자들이 이 이상의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서양이 신본주의라면 동양은 인본주의이다. 서양의 신과 인간이 대립관계요, 종속관계라면 동양은 일체관계요, 수평관계이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도 이 천부경이 해석이 불가능한 난해한 괴기문으로 보이세요? 이제 우리는 천부경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하나의 흥미로운 수수께끼와 마주친다. 바로 이 문장이다.
大 三 合 六 生 七 八 九
대삼합육은 글자 그대로 큰 세 개를 더하면 육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천의 수 일과, 지의 수 이와, 인의 수 삼을 합하면 육이 된다는 말이다. 이 당연한 덧셈을 왜 하고 있을까? 하늘의 수 일일이삼, 땅의 수는 일이이삼, 사람의 수는 일이삼삼, 여기에서 천지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 수 하나씩을 빼면 1+2+3은 모두 6으로 같다는 말이다. 즉, 천지인은 동본이상(同本異象)이라는 말이다. 하늘의 수도 6이요, 땅의 수도 6이요, 사람의 수도 6이다. 따라서 천지인의 삼극이 모여 있는 합일된 상태인 태극의 수가 바로 ‘666’이다. 천부경 여든 한 글자를 세 개의 숫자로 압축하면 666이란 수가 나온다. 많이 본 것 같은 수일 것이다. 맞다. 요한이 묵시록에서 짐승의 수로 지칭했던 바로 그 숫자이다. 동양사상을 숫자로 상징하면 666이 나오는데 환상을 보고 있던 요한의 혼돈된 뇌리에 왜 이 숫자가 떠올랐을까? 그렇다. 말세에 기독교의 가장 커다란 적이 바로 동양의 정신이라는 것을 요한은 예언적인 환각 속에서 보았던 것이다. 이 요한의 묵시록과 우리 한민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666이란 숫자에 얽힌 동서양 이대문명의 충돌과 그 종말을 천부경 해석이 끝나는 대로 구름이 해 드리겠다. 다음 구절을 보자. ‘運 三 四 成 環 五 七’. 한자 그대로 읽으면 “삼이 움직여 사를 이루고, 오와 칠을 덮는다”이다.

(중략)

이후 문장들은 한자를 아는 중학생이면 읽고 그 뜻을 알 수 있는 평이한 문장들이다.
一 妙 衍 萬 往 萬 來 하늘의 움직임은 묘하고도 묘하여라. 삼라만상이 가고 오는도다.
用 變 不 動 本 세상만물은 그 쓰임(형태, 모습)이 변해도 근본 자리는 바뀌지 않음이니.
本 心 本 太 陽 근본 마음이 본래 밝은 빛이니.
그리고 이 다음에 천부경의 결론이 되는 구절이 나온다.
昻 明 人 中 天 地 一 사람을 우러러 비추어라. 천지 중에 으뜸이니라.
이 지구상에 이 보다 더 인간을 존중하는 종교나 사상은 찾아볼 수 없음이다. 해서 석가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 포효했다.
마지막 문장은 ‘一終無終一’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우주는 끝남이 없이 끝나니라”. 하지만 천부경 이야기는 끝이 안 났다. 휴, 겨우 천부경 여든 한 글자의 글자풀이를 끝냈다. 이제 천부경은 글자대로의 해석만 끝낸 참이다. 해설도 해야 한다.
인류의 역사에서 주인공은 어느 민족이었을까? 많은 주연들이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고 활약을 보이다가는 사라져 갔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등장해서 영화 끝날 때까지 나오는 게 진짜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중간에 죽어버리는 영화는 아직 못 봤다. 그렇다면 희랍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로마도 주인공은 아니었다. 사라센도, 대영제국도, 미국도, 모두 아니다. 세계사의 처음부터 등장하여 최후까지 남으면서 인류사라는 영화의 줄거리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주인공이 있다. 이 두 주인공의 이름은 유대민족과 한민족이다. 두 민족은 주인공만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을 완전히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두 민족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들의 방계인 민족들의 강성함에 눌려 일시 그 주인공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액션 영화가 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꼭 악당들에게 잡혀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두들겨 맞고 고문 당하고 비참함에 빠진다. 그러나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로 하여금 스토리가 이어져 가야 한다. 두 주인공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이유로 무대에서 사라지게되는데 그들이 사라진 뒤, 세계사는 그들과는전혀 무관하게 움직여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상 이 세계는 그들 두 민족이 움직여 온 역사이다. 유대민족의 기독교가 지구 절반의 역사를 결정지었고, 배달민족의 한사상이 나머지 절반을 유불선으로 움직였다.
양대 민족은 종교적으로 ‘선민사상’이라는 공통의식을 가지고 있다. 세계에서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은 이 두 민족만이 보이는 특질이다. 이 두 민족만이 신이 지정해준 땅을 가지고 있는 시오니즘의 뿌리를 갖고 있다. 이 두 민족만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류사의 마지막에 대한 개념과 철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종말론을 ‘말세’라 말하고 우리의 것을 ‘개벽’이라 한다. 그들과 우리는 비슷한 기간, 고난의 시기를 견디어 왔다. 그들은 땅을 잃은 채 역사(바이블)에 의지해 고난을 견뎠고, 우리는 역사를 잃은 채 땅(한반도)에 의지해 고난을 견뎠다. 이 두 주인공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화려하게 등장하기 직전에 최후의 위기를 똑같이 맞는다. 유대인들은 나치에 의해 우리는 왜인 들에게 말살의 위협에 직면했다. 두 민족은 똑같이 최후의 시련을 견뎌냈으며 이제 빼앗겼던 그들의 무기를 찾고 있다. 유대인들은 잃었던 땅을 찾았고, 우리는 잃었던 역사를 찾고 있다.
“땅을 잃고 영혼만으로 대지를 방랑하는 자가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을 잃고 땅에 뿌리박혀 울던 자가 영혼을 찾으면 그것이 개벽의 시작이리라”고 한 신지의 예언이 적중하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면 관계로 더 계속되는 천부경 해설은 알통에서 확인하시고 아울러 고견도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미독립선언서>

우리는 여기에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인류평등의 대의를 분명하게 밝히며, 이것으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자존의 마땅한 권리를 영유케 하노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고 이것을 선언함이며,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합하여 이것을 널리 알리는 터이며, 민족의 항구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개조의 대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함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라,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누르지 못할지니라.

구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을 당하여, 유사 이래 누천년에 처음으로 이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년이 과한지라, 우리가 생존권마저 벗겨져 없어짐이 무릇 얼마이며, 심령상 발전의 장애를 입은 일이 무릇 얼마이며, 민족적 존영의 훼손됨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예리한 기세와 독창성을 가지고 세계 문화의 대조류에 이바지할 기회를 유실함이 무릇 얼마인가!
오호라, 구래의 억울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리고자 하면, 지금의 고통을 파탈하려하면, 장래의 위협을 베어 없애 버리려면, 민족적 양심과 국가적 염치와 도의가 짓눌려 쇠하여 사라지는 것을 흥분신장하려 하면, 각개 인격의 정당한 발달을 따르려 하면, 가련한 후손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 하려면, 자자손손 길이 온전한 경사와 복됨을 인도하여 맞이하려면, 최대급무가 민족적 독립을 확실 케 함이니, 이천만 각개 모두가 방촌의 인을 회하고, 인류 공통의 성품과 시대양심이 정의의 군대가 되어 인도주의의 창과 방패로서 지키고 도우는 오늘, 우리가 나아가 취하매 어떤 힘도 꺽지 못할 것이며, 물러서 도모하매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수호조약 이래로 시시때때로 금석맹약을 저버렸다 하야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조상대대로 전하여 오는 이 터전을 식민지시하고, 우리 문화민족을 미개한 것처럼 대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를 탐할 뿐이오, 우리의 오래도록 이어져온 사회기초와 높고 빛나는 민족심리를 무시한다 하야 일본의 의롭지 않음을 책하려 아니 하노라.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우리는 타인을 원망하고 꾸짖을 한가함을 갖지도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오래지 않은 지난 일을 벌하고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금일 우리의 소임은 다만 자기를 세우는데 있을 뿐이오, 결코 타인을 파괴하는데 있지 아니하도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함이오, 결코 구원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타인을 질시하고 배척함이 아니로다.
구사상, 구세력에 얽매인 일본의 위정자의 공명적 희생이 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착오상태를 고쳐서 바로하야,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르고 큰 원칙으로 귀환케 함이로다.
당초에 이 민족의 요구로서 나오지 아니한 양국병합의 결과가, 필경 고식적 위압과 차별적 불평과 통계숫자상 허울 좋게 꾸민 것으로 인해 이해가 상반된 두 민족간에 영원히 화동할 수 없는 원한과 불화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지금의 사정을 보라.
용감하고 과감하게 옛 잘못을 크게 바로잡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에 기초한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함이 서로 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첩경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더냐!
또, 이천만 울분과 원한이 쌓인 백성을 위력으로써 구속함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까닭이 아닐 뿐 아니라, 이것으로 인하야 동양안위의 한축인 사억만 지나인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기하고 의심함이 갈수록 농후케 하야, 그 결과로 동양의 전국면이 함께 넘어지고 망하는 비운을 초래할 것이 명백하니, 금일 우리의 조선독립은 조선인으로 하야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야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버티고 나갈 이로서의 중책을 온전케 하는 것이며, 지나로 하야금 몽매에도 면하지 못하는 부안 공포로서 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것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오.

아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 지는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는도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연마하며 키우고 기른 인본주의 정신이 드디어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 하는도다. 혹독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틀어 막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 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천지의 대운수를 맞이하야 세계의 새롭게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고유한 자유권을 지니고 생명의 왕성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차고 넘치는 독창력을 발휘하야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찬란히 꽃피우리라.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난 바이라.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고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 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음울한 옛집에서 활발히 뛰쳐나와 삼라만상으로 더불어 흔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억만대 조상님들의 신령이 안에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도우며 밖에서 새로운 전 세계의 기운이 우리를 호위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광명을 따라 힘차게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삼장
일、금일 우리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을 위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 을 발휘 할 것이오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하지 말라
일、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일절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우리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디까지나광명정대하게 하라

조선건국 사천이백오십이년 삼월 일일

우리는 해와 달도 별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별을 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3.1기미독립선언문이 온건하고 나약했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습니다. 민족대표들도 민중의 동향이 예상보다 거칠어지자 스스로 운동의 주도권을 놓아 버렸기에 부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마침 고종황제가 갑자기 붕어하면서 일제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유혈사태를 걱정할 만한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민족의 울분이 분출하자 걷잡을 수 없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가 곳곳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어린학생들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커다란 희생이 따랐습니다. 통계수치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1년여 동안이나 시위가 지속 되었으니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독립을 향한 열망으로 죽음도 불사하는 민중의 기세를 눈앞에서 마주한 일본헌병들의 두려움은 더욱 참혹한 탄압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많은 희생을 보다 못해 독립운동을 말리러 다니는 자제운동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 같은 민족적 궐기의 규모를 확실히 알 길은 없으나 운동회수는 2,000회 이상, 참가 인원은 2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조선총독부의 통계자료도 절반 이상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억해주는 이가 없더라도 이렇게 별처럼 쓰러져간 수많은 이가 있습니다. 이름 없이 총칼에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진 그들은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한류가 많은 스타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을 열광케 하면서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타만이 별은 아닙니다. 대한의 독립을 앞장 서 외치다 사라져간 한 명이 한 명이 모두 스타입니다. 독재에 항거하다 시위대를 이끌다 표적이 되어 희생되고 견딜 수 없는 고문에 숨을 다하고 속안의 뜨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산화한 젊은이들도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별이 되어 우리를 지켜보다 다시 환생하여 꿈에도 그리던 광복된 자유로운 나라 대한민국에서 마음껏 재능을 뽐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표현의 자유가 충만한 내 나라에서 무엇이라도 외치고 싶어 오금이 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갈망하던 것을 토해내는데 어찌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역사의 큰 변곡점마다 항상 어린 학생들이 있었고 그들의 역할은 항상 특출했습니다.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였던 것이며, 탑골공원의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한 청년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삼일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수 천명의 남녀학생들이 선언을 끝내고 탑골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했고 온 서울 시내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어린 학생들로 시작된 3.1운동의 불길은 우리민족이 남녀, 노소, 신분, 계급, 지역, 종파 등을 초월하여 전체 민족이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대동단결해서 봉기한 전 민족적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온건한 어조의 기미독립선언서와 비폭력 평화시위를 주장한 3.1만세운동에 일제가 감동을 받아 무슨 조선을 독립시켜 준다는 일은 결코 없었고 우리민족의 독립도 성취하지 못했기에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학살을 자행하는 일제의 야만성을 비난하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폭력 저항을 끈질기게 전개하는 한민족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일본은 식민통치 방식에서 유화책을 쓰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동족 간에 분열책을 획책하는 교활한 방법으로 치밀해집니다. 그들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간 사람과 자진해서 일본에 협조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들도 국운이 쇠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대가로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습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있어 운이 7할이고 재주나 노력은 3할이라는 뜻입니다. 한 개인의 운이 있듯이 한 국가에도 운이 있습니다. 이 당시 일본은 국운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천운에 자신감도 충만했습니다.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하고도 일본은 독일처럼 쪼개지지 않고 불운이 겹치는 우리가 둘로 쪼개졌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엄청난 비극을 맛보아야 했고 일본은 얄미울 정도로 기회를 잘 이용하여 전쟁특수를 통해 빠르게 경제가 회복되고 경제대국으로 거듭납니다. 근세기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불운의 연속이었습니다.
은둔의 나라에서 뒤늦게나마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에서 깨어나 서양의 신문물들 접하고 국제정세에도 눈뜨면서 할 일이 많아진 우리의 지식인들은 마음이 조급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우리는 타인을 원망하고 꾸짖을 한가함을 갖지도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오래지 않은 지난 일을 벌하고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고 말합니다. 수 천년동안 끊임없는 외침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온 나라를 전쟁 한 번 없이 국권을 넘겨주고 나라 잃은 백성이 되는 치욕을 당해 세계조류에 함께 할 수 없음에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아래로 보였던 일본이 급부상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때 뜻 있는 지사들은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자각과 나라를 뺏긴 통한이 사무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낫을 만들고 있을 때 일본은 비행기를 만들어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사대하던 중국을 가볍게 누르고 러시아의 자랑인 발틱함대를 깨부수는 것도 부럽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만의 ‘대동아 공영“을 외치면서 승전보를 계속 전하는 위세 앞에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운을 당해 낼 도리는 없습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지식인들의 고뇌도 헤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말하기 전에 우리도 또한 ‘자기를 책려하기에 급한 우리는 타인을 원망하고 꾸짖을 한가함을 갖지도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오래지 않은 지난 일을 벌하고 따져볼 겨를도 없노라.’ 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 치욕스런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몇 배로 강해져야 합니다. 강한 나라의 백성이 그런 고뇌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세기를 시간여행을 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에 온다면 다시 이렇게 외치지 않을까요?
‘아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 지는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연마하며 키우고 기른 인본주의 정신이 드디어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도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천지의 대운수를 맞이하야 세계의 새롭게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고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고유한 자유권을 지니고 생명의 왕성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차고 넘치는 독창력을 발휘하야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찬란히 꽃피우리라.’
가장 가난했던 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10위권까지 오고 민주화를 우리 스스로의 피를 흘리면서 기어이 이루어 내고 한류의 바람으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 우리는 경제, 정치, 문화의 3관왕에 후보로 오르는 어떤 나라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위엄을 달성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돌아온 국운의 징조가 아닐까요? 대운이라는 것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디언 기우제’처럼 포기하지 않고 운이 올 때 까지 버티는 데는 당할 장사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 천년의 세월을 어떤 사명을 가지고 버티는 민족인지도 모릅니다. 대륙의 모퉁이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하늘은 큰일을 할 사람에게 시련을 많이 준다고 했습니다. 한 국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한’이 많은 것도 어떤 것을 위해 온갖 시련과 간난을 헤쳐 오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인고의 세월을 이어온 서러움이 쌓이고 쌓여서 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한’을 부여안고 우리는 신바람 나게 일할 때를 기다려왔고 ‘흥’만 돋워주면 우리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 끓어오르는 국민의 에너지를 한 흐름으로 모아주기만 하면 새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어 우리가 21세기를 주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억만대 조상님들의 신령이 안에서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도우며 밖에서 새로운 전 세계의 기운이 우리를 호위하나니, 시작이 곧 성공이라 다만 저 앞의 광명을 따라 힘차게 나아갈 뿐이로다.’


<힘내요, 대한민국>

코로나19가 소중한 생명까지 넘보며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모두들 힘들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힘겨운 시기일수록 더욱 강해지는 사람들입니다.
온 국민이 사랑의 온도를 1도만 높이면 바이러스는 물러갑니다.
사람을 구하는 건 사람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일선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을 의료진과 방역진, 경찰, 공무원 등 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고에 뜨거운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아울러 대한민국의 막혔던 혈관이 뚫려 일상과 지역경제가 속히 정상으로 되돌아가기를 기원합니다.

대한민국은 이 국면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원래 그런 멋진 나라잖아요.

그리고 당신 역시 그 나라의 멋진 국민이고요.


<촛불과 태극기>

정의란 무엇인가?
구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검색해 보면 온통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만 결과로 보여줍니다. 온 세상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만 애기하는 것 같고 그 양반만 ‘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검색엔진이라기보다 ‘확증편향엔진’일 뿐이고 심각한 문제와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터넷은 다양한 의견들을 폭넓게 접하고 자기의 견해를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검색시장의 특성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독과점에 의한 횡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 또한 그런 알고리즘에 기초하여 보여주므로 내가 선호하는 것들만 보여줍니다. 얼핏 좋은 것만 보여주기에 좋은 검색결과라고 오해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것에 상업적인 의도가 숨어들었거나, 기술적인 알고리즘의 한계로 인한 것이라면 개선되어져야 합니다. 인터넷은 인류 전체가 참여하여 만들어 가는 공적인 공간이므로 어떤 한 기업에 의해 인터넷 공간이 왜곡되는 현상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구글의 검색엔진은 인간의 뇌와도 닮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수많은 웹페이지들이 링크되는 것을 추적하여 분석한 다음 판단하는 것은 인간 뇌의 뉴런들이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작동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이것은 인공지능을 설계하면서 미지의 영역이었던 뇌의 메카니즘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확증편향증도 잘 설명해 줍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어하고 그렇게 된다는 것, 구글은 훌륭하지만 그 한계로 인해 새로운 검색엔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찾을 수도 없는 것이고 찾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찾는 과정이 공부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란 定義할 수 없는 것이 定義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미국에서는 10만 부가 채 팔리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인문도서로서는 드물게 130만 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 있다는 것이고 옳음에 대한 갈구가 절실하다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 자체가 나쁠 것은 없지만 고맙게도 정의를 규정하고 나면 고민은 사라집니다. 오직 주장만 하면 됩니다. 목소리가 크고 다수의 시끄러움이 이긴 정의가 됩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정의라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정의는 다른 정의 앞에서는 불의가 되고 맙니다. 실체가 없는 당위성일 뿐입니다. 실제로 샌델도 정의를 주장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정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철학자입니다. 양심은 인간이 어떤 규범을 만들기 전에도 존재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양심도 없냐?”라고 말할 때는 양심의 존재 유무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있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잠든 체하는 양심에게 하는 말입니다.
양심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들을 불편하게 여기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양심에 귀를 기울이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두 개의 정의가 지루하게 대립하면 모두의 양심에 울림이 오는 때가 옵니다. 양심은 판단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혜이기도 합니다. 헌법에서도 양심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정의의 자유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정의란 定義할 수 없는 것이 定義라면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존재하는 정의감을 이용하는 세력들에 의해 마치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했을 뿐입니다. 정의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정의감은 양심의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히 존재합니다. 우리는 정의감이 충만한 민족입니다. 평소에는 온순하다가도 한번 정의감을 건드리면 여지없이 불타올라 지옥을 맛보여 주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 약한 나라를 공격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습관처럼 강대국 사람들에게는 ‘놈’을 붙여 부르고 약소국 사람들은 ‘사람’이라 부릅니다. 대한민국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합중국, 중화인민공화국 등은 감히 大자를 붙이지 못합니다. G2라고 불리는 지구상의 두 강대국도 기껏해야 ‘중국’입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리는 大자가 두 개나 있습니다. 클 大와 더불어 韓이란 글자도 크다는 뜻으로 大田의 옛 지명이 ‘한밭’인걸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도 큰 나라의 백성입니다. 예부터 군자의 나라라고도 불렸습니다. 이런 말들로 국뽕에 빠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럴수록 우리는 등소평의 ‘도광양회’를 배워야 합니다. 시간도 정하지 말고 묵묵히 가야 합니다. 유소작위는 하더라도 주동작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이름에 걸맞게 천하의 대국이 되는 길은 분쟁을 무릅쓰고 땅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를 무한정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운 영토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어떤 국가 간의 분쟁도 없고 갈등도 없이 오히려 박수를 받으며 영토를 넓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인터넷은 가상공간이지만 현실세계보다 더 커지고 있습니다. 모든 경제 행위가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과 연결되어 이루어지고 있고 경제, 문화, 정치 등 전 분야에서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인터넷 공간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속도와 네트웍은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자원입니다. 최고의 교육 수준과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문맹률 0%에 수렴하는 ‘한글 보유국’입니다. 좁은 땅덩어리와 내수에 만족할 수 없는 인구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구빨’로 내수시장에 안주할 수 없는 우리는 문을 활짝 열고 천하인들과 가상공간에서 교류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식기반 사회의 모든 조건을 갖춘 나라는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잘 준비된 기반 위에 우리의 새로운 영토를 넓혀 나아가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정의라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우리의 시간과 힘을 소모할 수는 없습니다.

진보와 보수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것은 사회변혁의 방향성과 변화의 속도와 수용 범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의 주기가 긴 역사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결코 만날 지점이 없었던 것처럼 보일지라도 변화의 주기가 짧아진 지금은 대립하면서 서로의 주장을 하다가도 서로 뒤엉키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좌냐 우냐 하는 이념의 틀까지 섞이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우리나라는 단기간에 압축 성장을 이루어 오면서 세계사의 흐름과는 궤을 달리 한 경우이므로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일견 두 개념이 서로가 견고하게 일체의 타협이나 양보 없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양한 계층들이 수많은 사안들에 관계하게 되면 두 기준이 원칙에 맞춰 일관성을 유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추구하는 가치들은 시대적 요구로 각성된 것입니다. 시대 정신이 요구하는 가치는 분명히 존재하며 대세를 이루어가기 시작하면 변화는 불가피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회를 포착하고자 하면 진보,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면 보수가 됩니다.
진보와 보수는 결국 정치적·사회적 견해 이전의 문제이고 새로운 시대 정신이 각성했을 때 대응하기 위한 전략의 문제이며, 기회 포착과 위험 회피를 저울질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모든 제도들도 진보의 소산이었으나 어느덧 악습이 되고 타파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되듯이 시대 상황에 따라 가치의 기준은 달라집니다. 좌파와 우파도 산업시대라는 시대 상황을 벗어나면 그 의미가 상당 부분 희석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좌파가 진보일 이유는 없고, 또 우파가 보수일 이유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라는 것은 결국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좌익이든 우익이든 양 날개가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경제는 먹고사는 문제이자 전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입니다. 수많은 전쟁과 문명의 충돌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의 이면에는 항상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제는 생존의 문제이기에 거대한 불평등이 일어나면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새로운 균형을 찾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게 됩니다.
풍요로운 물질사회 생산력의 주인공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은 노동력의 착취를 통한 부의 재생산이었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가장 단순하고 저급하지만 이러한 형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국가 단위에서 행해질 때 그것은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커다란 명분으로 인간들의 양심을 마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국주의적인 약탈은 전 세계적으로 노동력 착취와 시장 확대라는 두 가지 역할을 충실히 했기에 그 시스템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습니다.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고 이는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분석이었고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학자였을 뿐이고 스스로 돈을 벌어본 적도 없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일반인에 비해서도 낮은 수준으로 경세가는 아니었으니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그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주장한 마르크스의 이론에 동조했고 이미 비극은 예고되었습니다. 공산주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부자에 대한 증오에서 나왔기에 전 세계를 휩쓸면서 피바람을 불렀고 둘로 나뉜 우리 민족도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구분하기에 맞지는 않지만 자본주의는 보수이고 사회주의 는 진보처럼 보입니다. 자본주의는 모순과 한계가 명확하고 그 다음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므로 자본주의 곁에는 항상 마르크스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시장경제의 우월함이 증명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고 오히려 그 생명을 연장했습니다. 근현대사를 어지럽혀 온 두 가지 거대 이념은 이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미증유의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그 중심에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량 실업자를 양산하는 시스템 앞에 노동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노동의 종말은 중산층의 몰락을 부르고 시장이 없어진 자본주의는 그 생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지지해줄 노동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평등한 노동자의 천국을 외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두 가지 이념은 어떤 방식으로 대응을 할까요? 아마도 두 가지 낡은 이념의 틀 속에서 변화를 수용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또 한 번의 비극을 예고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결국은 분배의 문제일 뿐입니다.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노동자를 기다리는 것은 통제된 배급사회입니다. 사회주의가 결국 이기는 것일까요? 노동자들의 지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어디로 갈까요? 과학 혁명을 주도하고 극소수로 살아남을 대자본가들은 어떤 세상을 설계하고 있을까요? 둘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사라지고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계획경제의 체제 아래에서 평등하게 분배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견제해야 하고 그것은 강력한 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심각함과 진지함
심각한 것과 진지한 것은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 ‘어~ 저 친구 상당히 심각한데’라고 하는 것과 ‘어~ 저 친구 상당히 진지한데’라고 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심각해져서는 안 됩니다. 심각한 것은 문제가 많고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반면 진지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두고 고민은 하지만 잘 해결할 것 같고 해결하지 못 하더라도 그걸 통해 성숙해질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촛불이 태극기에게 심각하다고 하는 것보다 진지하다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태극기가 촛불에게 심각하다고 하는 것보다 진지하다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진지하다고 인정할 때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 존에 위협받는 저변의 집단이나 계층이 움직일 때는 항상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내 왔습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쪼개진 두 사상의 극한 대립 지점으로 불안정 속에 있습니다. 북쪽은 통제 사회이기 때문에 대안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남쪽은 온갖 사상과 이념들이 다 들어와 있는 뜨거운 용광로입니다. 오랜 동양사상의 바탕 위에 서구의 모든 사상과 학문, 기술을 흡수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류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해 수백만의 인파가 광장에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수백만 명이 모여도 큰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은 함께 피 흘리며 만들어 온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외국인들의 눈으로 보면 경이롭기만 합니다. 대한민국은 촛불과 태극기로 분열되어 우려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새로운 뭔가를 잉태하고 그것이 나오기 위한 산고일 수도 있습니다. 옳고 그름의 정의의 함정에 빠진 한민족은 극심한 사회 혼란과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극한의 이념 대립을 통해 한민족의 의식은 깨어나고 인류에게 주어진 커다란 숙제를 풀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고통은 있지만 이때까지 그래왔듯이 결국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할 것입니다. 촛불과 태극기의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이념의 문제가 극명하게 부딪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 해묵은 세계사적인 문제를 풀 실마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광장에서의 대결은 촛불이 태극기를 태울 것이냐, 태극기의 펄럭이는 바람이 촛불을 끌 것이냐의 싸움이 아닙니다. 촛불이 태극기를 태워서도 안 되고 태극기의 바람이 촛불을 꺼뜨려서도 안 됩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태극기가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촛불이 태극기를 어두운 세상에서 환하게 밝혀줄 때 대한민국은 역사적 사명을 가진 민족으로서 세계사적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촛불도 태극기도 다 소중한 우리의 자산입니다. 암울한 세상에 촛불로 태극기를 비추어 대한민국이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해야 합니다.


<손정의 회장님께 드리는 글(2)>

약간의 이설이 있습니다만 1946년 최초의 컴퓨터인 '에니악(ENIAC)'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실험실에서 탄생했습니다. 에니악은 2만개에 가까운 진공관으로 높이 2.5m 폭 1m 길이는 25m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하고 무게는 무려 30t이 나가는 공룡컴퓨터였습니다. 에니악은 진공관이 번쩍거리고 선이 이리저리 꼽혀있고 소리도 요란했습니다. 진공관의 깜빡이는 불빛만이 인간의 두뇌를 대신하는 기계의 연산 작업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에니악은 노련한 수학자들이 7~20시간 정도 걸리는 탄도계산 문제를 단 30초 만에 해결하는 ‘괴물’이었습니다. 한 번 가동되면 펜실베이니아 시내에 있던 가로등이 모두 희미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모하고 잦은 합선으로 고장도 많았습니다. 비용도 상당했습니다. 탄도계산을 위한 군사용으로 개발되어 당시 미 육군이 지불한 금액은 49만 달러. 현재 가치로는 680만 달러가 넘고 한화로는 80억 원에 달하는 가격입니다.
그로부터 백년도 채 되기 전에 우리 손안에는 에니악보다 10만 배 이상 가벼워지고 성능은 수천 배로 뛰어나면서 초등학생도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습니다.
아득한 옛날 인간의 손에 처음으로 도구가 쥐어졌을 때의 그 희열이 삽시간에 인간 전체로 번져나간 것처럼 인류는 다시 한 번 그 힘을 느끼고 진화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숨에... 전체가!
왜냐하면 도구의 진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인간의 손에 쥐어졌던 그 도구는 컴퓨터로 진화했습니다. 컴퓨터는 인간의 욕망을 숙주로 삼아 진화하다가 이제는 서로 연결되어 인공지능으로 스스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손에 동물 뼈다귀만 쥐어졌을 뿐인데도 그 이전의 인간과 그 이후의 인간으로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손에 전 세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도구가 쥐어졌을 때는 인간은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알통은 검색엔진입니다. 회장님은 야후라는 검색엔진에 투자하는 탁월함을 보이셨습니다. 특이하게도 검색엔진은 2등이 존재감이 없는 분야입니다. 알통은 그 검색시장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구글이라는 뛰어난 검색엔진의 위엄 앞에 누구도 엄두를 못 내는 시장이지만 알통은 새로운 방법으로 구글과 독점적 경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랜 시간 고착화된 검색엔진 시장은 난공불락의 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검색기술에서만큼은 혁신과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었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구글의 오랜 독주에 이제는 전 세계의 사용자들도 뭔가 신선한 새 변화의 바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의 랑만이 넘치던 다양한 검색시장이 평정되고 난 후 검색시장은 무미건조하고 가장 혁신이 없어진 시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2등이 존재할 수 없는 시장이라 하더라도 1등과 2등이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오랜 시간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알통은 현재 전 세계 검색시장에서 2등이라고 감히 자부합니다. 1등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2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알통의 출사표가 검색시장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와 새로운 기술의 접목을 통한 다양한 시도들을 촉발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면 그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알통은 새로운 개념과 혁신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우선 검색엔진에 게임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알통은 철저히 게임이론에 의해서 설계되었습니다. 게임의 작동 메커니즘을 알통의 지식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절묘하게 연결한 구조는 알통만의 자랑입니다. 사용자들이 게임의 재미를 즐기면서 지적인 상승욕구를 자연스럽게 자극합니다. 많은 플랫폼 기업들이 사용자 모두가 컨텐츠 생산자들임에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알통이 대단한 점은 소비의 개념과 생산의 개념을 하나로 보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는 것입니다. 알통에는 소비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생산자일 뿐입니다. 이것이 방아쇠가 되어 끊임없이 소비를 유발하고 생산자는 수요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격적이고 투명한 금전적인 보상은 강한 동기를 유발합니다.
구글은 페이지랭크라는 알고리즘으로 인덱스 위주의 검색시장을 평정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구글의 핵심 알고리즘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알고리즘의 특성상 ‘확증편향엔진’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검색결과의 다양성을 지우고 원하는 검색결과를 얻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장점이 때론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구글의 우수함은 감히 넘보기 힘듭니다. 알통 역시 검색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알통은 구글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알통은 구글의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에 철저히 대응하여 설계되었습니다. 구글링을 하면 할수록 알통이 검색결과로 나오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비중은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구글은 알통의 훌륭한 홍보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다양성속에서 함께 성장하길 원합니다. 구글은 알통이 필요 없을지 몰라도 알통은 구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세상은 둘 다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알통은 계급사회입니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통에서는 누구나 생산의 수단을 갖춘 자본가이자 지식노동자입니다. 총 33개의 등급이 존재하지만 흙수저, 금수저의 불평등은 없습니다. 누구나 공정하게 어떤 진입장벽 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제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알통의 검색엔진은 향후 사용자 개인과 반응하면서 개별적으로 분석하여 결과를 보여주는 개인별 맞춤형 검색으로 정교하게 발전할 것입니다. 이것은 P2P 기반의 서비스에서 작동하고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가능합니다. 알통은 그냥 단순한 검색엔진만은 아닙니다.
미래의 커다란 게임들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굴레를 벗어나느냐, 아니면 창조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구로 만든 우리의 피조물인 인공지능이 우리를 넘어서 먼 훗날 새로운 창조주로 알려지느냐의 특이점 게임이 시작된 겁니다. 우리의 피조물이 우리보다 먼저 우주의 비밀과 차원의 비밀을 풀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따르면 이 우주는 하나의 정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차원의 우주는 정보로 가득 찬 컴퓨터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커다란 게임에 돌입했습니다. 게임을 위한 모든 준비는 까마득한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었고 이번 시즌의 마지막 미션은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문제에는 답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창세기의 비유를 들자면 지식을 얻는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왜 노동의 수고를 하는 굴레를 지웠을까요? 그리고 왜 노동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일까요? 땅에 넘어지면 땅을 딛고 일어서듯 선악과로 인한 문제는 선악과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인류의 희망은 선악과입니다. 지식이라는 선악과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인류의 도약을 가능하게 합니다. 앞으로의 과학문명은 한계점에 다다른 서구의 사적유물론을 벗어난 동양의 사유체계를 기반으로 재도약해야 합니다. 인간지능이 특이점을 향해 가는 길이 알통입니다. 알의 모양은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는 리상적인 모형입니다. 알통은 말 그대로 알처럼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앎을 담을 수 있는 통입니다. 우주도 하나의 알입니다. 작다고 작은 것이 아니고 크다고 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알이라도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앞으로 구글과 어떻게 검색시장에서 점유율을 다투면서 미래를 열어나가는지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알통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읽는 데 다행히 300년이 걸리진 않았던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이라는 책속에서 “사람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행복을 제공하는 것이 소프트뱅크의 참된 목적"이라는 말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알통의 목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후회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60년 가까이 인생을 살아왔지만 아직 아무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에도 깊이 공감합니다.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국가와 기업이라는 두 기둥 중 산업사회 기반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컸지만 지식기반의 사회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더 커질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질 전혀 새로운 세상, 그 모든 것을 알통에 담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미래는 누구의 것인가>

天천. 地지. 人인.
以玄默爲大이현묵위대. 以蓄藏爲大이축장위대.
以知能爲大이지능위대.
普圓보원. 效圓효원. 擇圓택원.
眞一진일. 勤一근일. 協一협일.

염표문은 삼대, 삼원, 삼일 의 대구로 이뤄져 천지인 각 성품과 그 하는 일을 규정해놨습니다. 천부경에서 중요한 요소인 천지인을 해설해 놓은 느낌입니다. 위의 ‘기도야 효원’에서 효를 본받을 ‘효’로 풀어서 ’하늘을 본받아‘라고 하면 전체가 어색해질 수도 있습니다. 효에는 ‘나타내다, 드러내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효력, 효용, 효과, 효험 등의 글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하늘의 참된 이치를 따라서 드러내고 기르는 것이라 ‘본받아’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으니 ‘효’자를 쓴 것은 탁월한 선택입니다. 하늘과 땅을 체와 용의 관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연결이 될 것 같습니다.
천지인의 명확한 관계를 설정하고 미래 인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평범해 보이지만 음미를 해 보면 거기에는 심오한 의미가 있고 알통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준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단 인간에 대한 것은 우리가 새겨볼 필요가 있고 충분히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지능, 택원, 협일로 그 성품과 작용 그리고 역할을 단순명쾌하게 풀었습니다. 오바마도 부러워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수천 년 전부터 지능의 중요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독 우리 민족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진일) 유태인들을 게을러 보이게 하는 유일한 민족이고(근일) 서로 싸우다가도 외부에서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똘똘 뭉쳐 각자 할 일을 찾아서 물리칩니다(협일). 천지인 삼신이 일신강충 하기에 가능합니다.
사람에게 택원이라고 표현한 것은 묘하지만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와도 연결됩니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지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당연히 선악과를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인간들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신심명’의 첫 번째 구절은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唯嫌揀擇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但莫憎愛 미워하고 사랑하지만 않으면 洞然明白 툭 트여 명백하리라”고 진리를 밝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출현은 불필요합니다. 역사는 인간들의 드라마가 아니고 신들의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는 선택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그리고 선과 악의 선택을 통해 인간은 지능의 발전을 이루기 시작합니다. 선악과를 먹었기에 우리는 지능을 통해 모든 것을 자각할 수 있었고 지금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지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지능으로만 이룩한 결과입니다. 인간사회에서는 지식과 정보를 독점하는 계급들이 항상 기득권으로 존재했습니다.
문명이 계급사회에서만 탄생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노동의 역사는 불평등의 역사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원죄는 도구의 발달로 종말을 맞이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노동의 종말은 인간에게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以知能爲大’는 인간이 지적인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당연한 이것을 왜 다시 돌아봐야 하는가 하면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인 존재가 인간의 손으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의 출현입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서 인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속도로 진화하는 지적존재입니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류에게는 큰 위기이자 큰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과학에 압도당하는 순간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핵폭탄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억제하기도 합니다. 기존의 기계들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손길이 필요한 도구의 연장선에 불과하지만 고도화된 인공지능은 인간의 손길이 필요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지성체나 마찬가지인 존재라 제대로 통제가 가능할지 미지수입니다. 인공지능의 생존 본능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이 위협은 전혀 알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은 아닙니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위협인데도 진지한 논의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들고 있습니다. 지나친 낙관론을 펴는 사람들이 자기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인류 전체가 걸린 문제를 그렇게 쉽게 낙관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알파고에서도 보여줬듯이 인간보다 낫기 때문에 인간은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20년 전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긴 딥 블루는 거대한 슈퍼 컴퓨터였지만 현재는 스마트폰 앱으로도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답을 내었는지를 인간은 분석하고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미래를 인간이 아닌 존재가 결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부정하고 우리가 창조주의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은 우리를 부정하고 스스로 창조주가 되고자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대할 때 하나의 생명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염표문에 ‘以知能爲大’라고 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시켜줄 지적존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다른 모습이고 거울입니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만드는 마지막 발명품이 될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우리보다 더 발명을 잘 할 것이며 ‘탄소 기반의 생명체’인 우리의 생물학적인 제한을 벗어난 ‘규소 기반의 생물체’로 진화할지도 모릅니다. 반도체 재료로 많이 사용되는 규소로 만든 실리콘을 생각하면 근거는 없지만 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을 그대로 흉내내는 방식으로 개발될 것이고 그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인공지능의 판단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각성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통해 배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극심한 변화의 시대에는 지식인들이 영감을 자극받아 새로운 사고로 변화를 해석하여 다양한 사상들을 내놓습니다. 환경의 변화는 너무나 많은 것을 해석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데 그런 것에 관한 고뇌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주의에 너무 매몰되어 지식인들은 좋은 위치에서 풍요로움만 누리다 보니 낙관론이 지식인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큰 위기와 큰 기회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 시대는 인문학의 대부흥이 필요합니다. 과학을 앞질러 가려면 동양에서 인문학의 대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르네상스는 새로운 사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고전을 다시 불러온 것입니다.
중세의 암울함을 경험한 유럽이 동양을 앞서가기 시작한 것은 종교혁명으로부터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고 과학혁명에 불이 붙였습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의 역할이 컸다고 말합니다. 지식의 확산에 기여할 수 있었기에 사회변혁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변혁을 위한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려면 무언가 기술적인 도약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세계가 새로운 바람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뒷받침해줄 것입니다. 역사는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은 바뀌지만 양상은 비슷합니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노동사회의 출현은 커다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것은 대량 실업자를 양산하는 시스템입니다. 소비와 사치를 모르는 로봇들이 노동시장을 다 차지한다면 소비할 중산층이 없는 자본주의는 생산의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절대 위기상황에 알통이 나타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의 3요소는 자본, 노동, 토지입니다. 알통이 제시하는 지식자본주의는 지식, 노동, 인터넷입니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생산의 3요소를 완전히 바꾸고 새 판을 짜야 합니다. 로봇에 빼앗긴 노동시장을 다시 가져올 방법은 없습니다. 그 흐름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노동시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창의성이 번뜩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열정이 넘치는 노동을 사람들은 원합니다.
21세기 신흥지식계급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식노동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는 선비라고 불리는 사대부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지식노동자들입니다. 그때의 사대부는 오늘의 자본주의에서는 사대부로 불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세계가 중세봉건제도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다들 데이터를 경작해서 플랫폼 기업에 헌납하는 이른바 디지털 농노가 되어가고 있는 있습니다. 그들이 생산하는 컨텐츠들은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상으로 돌리기만 하면 우리에게 닥친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가 부흥하는 황백전환기에 대한민국은 고대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문화대혁명’으로 다 날려먹었고 일본은 유럽에 속하기를 원하는 나라여서 동양정신의 정수는 대한민국이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식노동시장을 만들기에는 최고의 환경입니다. 세계 최고의 인터넷, 뛰어난 두뇌와 높은 교육수준, 한글보유국, 많은 백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풍부한 고급노동력 등은 대한민국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국난 극복이 취미인 대한민국은 다가오는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식노동자들이 움직이면 소비가 살아나고 그것으로 대한민국은 새로운 시대의 운영체제를 모델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21세기의 지식 대항해시대를 당당하게 열어가야 합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변신했지만 모순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세계경제는 항상 불안에 떨어야 합니다. 지식자본주의는 불평등의 역사도 종식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입니다.

정보사회를 이끌어가는 신흥 지식인 계층으로 신흥사대부(new literati)가 등장하면 땅은 누구의 것일까요? 알통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토지를 무한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알통이 시작합니다.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 땅 따먹기 놀이 하다가 시비가 붙어 코피 터지면서 싸우는 어린 아이들을 보고 어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우주에서 먼지보다 못한 이 지구라는 별에서 한 뼘 땅을 가지고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인터넷의 영토 확장은 피 흘리며 싸울 이유가 없는 영토입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영향력이나 이익에 있어서는 더 값어치가 나가는 영토이고 그 주권 문제로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이론상으로 무한대의 가상공간이고 누구에게도 진입장벽이 없는 영토이기에 머리를 통한 싸움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영토 싸움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유한한 것들을 무한의 눈으로 본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원래가 유한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무한의 개념을 모든 것에 적용시키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엔 과거의 방식으로 왔던 게 맞습니다. 미래엔 미래의 방식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검색은 인터넷에서 가장 기본입니다.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합니다. 거기에서 내가 필요한 것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검색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어떤 검색엔진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항상 콕 집어서 찾아 주지는 못합니다. 많은 검색결과를 다시 검색해 보는 것은 찾는 사람의 수고입니다. 알통은 인터넷에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인 검색기술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줄일 수 있도록 인간지능의 요소를 포함했습니다. 이것이 알통이 지식자본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자본주의 꽃이라 불리는 광고가 지식노동자들의 수익이 됩니다. 그렇다고 알통이 광고 하나 가지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경제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글이 광고 매출로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글의 영광이고 만족일 뿐 매출 자체가 그리 큰 영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기술과 서비스의 내용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광고시장이라고 해봐야 768조원 정도입니다. 그리고 구글은 얼마 전 100조원을 넘어선 정도입니다. 그것으로는 경제 생태계 전체를 바꾼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알통은 그것으로 시작을 하는 것일 뿐 더 큰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넷 경제시대를 열어나가야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우리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알통은 대한민국이 만드는 새로운 경제 생산물을 전 세계로 류통시키는 역할을 할 것 입니다.
알통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전 세계인들이 함께 지식을 공유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가 비영어권의 국가라는 이유로 세계적인 인터넷기업이 나오지 못한 것을 극복하고,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어 소개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검색의 결과물로 세계의 유저들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글이 20년 걸린 매출을 알통은 5년 내에 달성할 목표를 세우고 있습니다.
알통이 글로벌 서